하린 시인의 시집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어머니의 저항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 하린
직구-아버지
소속팀을 또 옮겼다 군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만 들어오는 동네에서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새로운 규칙이 발효되자 방어율이 형편 없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생산의 밭을 자르고 도시 변두리로 이적료도 없이 옮겨갔다 주물공장으로 빨려들어간 건조한 어깨가 은퇴를 예감하게 했다 뜨거운 쇳물에 발등이 데인 후 공의 구질이 너무 단순한 게 문제였다고 실토했다 직구만을 던지는 습성은 시즌 내내 흥행 없이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낡은 감독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닦이로 사라져간 윤리교과서였다
슬라이더-어머니
원래 직구를 가장 잘 구사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술취한 아바지에게 얻어맞고도 끈질기게 땅만 팠다 논과 밭에 구사하는 느리고 정직한 구질은 진딧물 탄저병 태풍에게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 어머니도 변두리 식당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뻔한 직구 대신 반찬에 미원을 쓰며 변화구를 구사했다 손님들의 혓바닥은 방망이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구질에 속아 넘어 갔다 어머니는 한동안 집안에서 에이스로 인정 받았다
포크몰-형
왼손잡이었다 형이 마운드에 들어서면 출루하는 놈들이 많았다 1군들만 모인다는 s대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이나 들추다가 약삭빠른 놈에게 안타를 맞고 도루까지 허용했다 졸업도 하지 못한 채 강판당했다 형은 소속팀을 떠나 지리산과 인도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6년 동안 형이 사라진 후 '제3의 물결'이 밀려와 새로운 구질을 가진 젊은 선수들이 주목받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광속의 구질을 형은 구사하지 못했고 2군으로 밀려나더니 결국 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떨어졌다
커브-누나
누나는 일찌감치 포수로 돌아섰다 인기가 많은 투수를 거부한 채 새마을금고의 포수가 되었다 마을금고의 감독은 자꾸 변화구를 받아 내라고 주문했다 VIP 고객들은 누나의 미끈한 다리 사이에 입금하길 원했고 누나는 승률을 위해 적당한 편법을 동원했다 야간 경기도 서슴지 않았다 누나의 실적은 높아졌고 승진하여 곧 코치가 될 거라고 했다
마구-나
나는 실업팀에 무명선수가 되었다 임시직을 반복하다 30대 중반을 넘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다 정식 선수가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죽던 날 승리의 기쁨인지 패배의 억울함인지 어머니만이 눈물을 흘렸다 형과 누나는 벌건 육개장 국물에 지루한 감정을 휘휘 저어 먹었다
박찬호가 던진 강속구에 맞은 BMW 차량의 수리비는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워낙 튼튼해서 하나도 안 나온대……난 마구를 던질 거야 꼭 BMW 차를 무너뜨릴 거야……
형은 말이 없었다 누나는 죽음만이 은퇴를 허용한다고 주절거렸다 관중들은 건넛방 초록색 그라운드에서 야유하듯 화투장을 날렸다
어머니의 저항(Ω) / 하린
건전지 갈아 끼우듯 여자를 바꾸던 아버지가
안방에 들어서면 스파크가 튀는 밤이다
두꺼비집에 두꺼비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저항 한 개를 추가하며
꼬마전구처럼 소심하게 깜빡거리고만 있다
아버진 뒤늦게 어머니와 접속을 시도하지만
어머닌 차단기 내린 지 오래
전압이 센 할아버질 수발한 이력을 어머니가 토해낼 때마다
양과 음이 쪽쪽 빨아대는 전류의 본능만 탓하는 아버지
어머닌 한이 충전된 배터리를 꺼내
아버지 몸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여자들을 지져댄다
눈이 뒤집힌 여자들이 하나둘 꽁무니를 뺄 때
아버진 수명 다한 필라멘트처럼 퍽 맥이 풀린다
과부하가 걸리는지
면상에 손가락까지 찔러대는 어머니
오긴 왜 와? 여기가 어디라고!
급기야 하늘과 지상 사이에 퓨즈가 나가는 소리
이승과 접속이 끊기는 소리 살벌하게도 튄다
어휴, 난 어머니가 차려준 전기만 먹고 살아야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희한한 발전기를 몸 안에 단 어머니
다 타버린 향불 앞에 독주 한잔 따라 올리며
40년이 넘은 울음센서 스위치를 누른다
누전(漏電)인지 누전(淚田)인지……
제삿밥도 못 먹은 방전된 아버지, 내년에도 또 오실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