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째 카레 - 하린 시인님
일주일째 카레
- 하린
친절
일주일째 카레를 먹는다 여자가 제일 잘 하는 것은 볶고 지지고 섞는 일 조리대 앞 재료들 표정이 어둡다 당근과 양파에서 잘려나간 줄기는 주말에 시들었겠지 출장 가는 여자에겐 낙천적인 뿌리가 있기나 한 걸까 떴다 떴다 비행기, 여자가 사랑한 비행기는 어떤 포즈로 친절할까
비밀
이사를 하고 벽에 상처를 내는 데 익숙하다 상처가 생을 탐한다 벽은 용도를 변경하지 않는데 사람만 용도를 변경한다 현관 너머가 궁금하지 않다 초대하지 않아도 오는 사람과 초대해도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 신발의 방향은 늘 현관 쪽인데, 마음의 방향은 거실 쪽이다 벽처럼 서서 죽고 싶은데 카레가 또 끓는다
자백
수요일 10시에 애인에게 자백한다 카레는 같이 못 먹겠다고 밖이란 것은 당신 기준이고 난 이미 바깥이라서 더 낡은 무릎이 되리라 통보한다 애인은 절대 울지 않는다 우리는 한때 일뿐 한 방향은 절대 아니다 헤어지지 않을 이유는 크게 한번 웃지 못했기 때문, 3분 요리 3분 통화 3분 사랑은 3분을 못 채우거나 지나쳐서야 멈춘다
악몽
소용없다 목요일에는 그 어떤 형용사도 되지 못한다 한 그릇의 카레로는 국경을 넘는 자를 음미할 수 없고, 그릇은 위로가 아니라 탈퇴한 멤버가 남긴 후기 일뿐, 잠시 씹는 것을 멈춘다 카레가 육식인가 채식인가를 떠올리다 이빨 사이에 낀 질긴 인연에 혀가 놀란 척을 한다
극진
벽을 뚫고 개가 나를 빤히 본다 내 눈동자가 개의 눈동자에 눌러 붙는다 닥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내 얼굴이 물어뜯긴다 분명 아무도 살 수 없는데, 허공뿐인데, 환幻이 날라 다닌다 아내와 애인은 모두 기별이 없고 '당신 오늘 보니 옆집 같아' 메시지만 깜박거린다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어떤 쪽이든 내가 나를 보지 않는다
유리
볼 수 있다 갇혀 있다 누군가 빗방울처럼 미끄러진다 표면에 전단지처럼 첨부된다 뭔가가 떨어지기 좋은 일기예보, 입김을 불어 '선명한 내적 갈등'이라 적는다 멀겋다 빨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독백도 결국엔 질문이다
거쳐
슬픔도 아닌 것이 그리움도 아닌 것이 눌러 붙기 직전이다 식사 다음에 뭐 하지? 산책 아니면 섹스? 싸구려 장면은 지긋지긋해 차라리 외박을 해, 내 안엔 집회도 없고 거룩한 공원도 없다 떠도는 일요일을 어디에 버리고 와야 하나 지구의 혈을 누른 자국처럼 신발 하나 남겨진 강둑을 걷는다 물은 목적도 없이 거처를 저리 쉽게 숨긴다 모든 주관성이 착각임을 안다 그러니 오늘 나는 역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