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네잎 시집 『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
타자의 신비를 만나려는 활동
―김네잎 시집 『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
김효숙(문학평론가)
보았으나 보이지 않을 만큼 익숙한 세계는 사실상 모호한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곳을 벗어나기로 작정한 자다. 움직이는 주체는 변하기 마련이나, 부동의 주체는 불변한다. 근시성에 포박되지 않으려 하면서, 불변을 조장하는 안정과 정착 상태를 깨고 나온다. 시인은 세계와의 불화로 비동일성을 조성하면서 언어를 창조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열어놓는다. 이것이 김네잎 시에서 비-장소들이 빈번하게 출현하는 이유다. 단지 경유지일 뿐인 비-장소에서는 모든 이들이 서로 소격된다. 정착과 안주는 이 시인에게 몹시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이겠지만 『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2020)에서는 당신과의 만남조차 예외 없이 이별의 전조 증상처럼 보인다.
시인은 크게 세 개의 방향에서 시적 수행을 해나간다. 당신과의 교섭/분리로 알아가는 타자성, ‘우리’라는 공통의식이 끊긴 사회로 확장하는 자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언어화하느냐는 작가 의식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는 관념의 옷을 입고 활보한다. 간접 언술로 감추는 작법이어서 모호하게 읽히는 시들이다. 세계와의 동일화를 깨고 나와 또 다른 세계로 확장하는 자아들이 거기에 있다. 또 다른 시에서는 현실에 세심하게 관여하여 탐구하고 실천하는 시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직접 언술로 구체성을 띠면서 실존 문제로 접근할 때가 그때다.
다른 하나의 특이점은 시인이 펼치는 시적 수행이다. 김네잎의 시 쓰기는 연상 작용이나 생각놀이로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는 능력이 쓰기를 촉발하는 지점을 메타적 고민으로 풍성하게 엮어낸다. 타자와 비동일화를 꾀하는 나·너·당신이 출현하는 곳에서는 상징계와 무의식 간 경계가 지워진다. 언어 관리자인 시인이 무의식을 말한다면 이때는 상징질서를 언표하는 순간이며, 시 한 편이 언어 매체로서 자질을 갖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의미 없이 놓인 세계를 다시 바라보려면 그곳을 벗어나야 하고, 언어의 매개가 없다면 그곳을 의미화할 방법도 없다.
1. ‘당신’을 쪼개어 말하기
맹목은 눈앞이 캄캄한 바라보기의 한 방식이다. 눈을 떴으나 보이지 않고, 보았으나 그 의미를 모른다. 김네잎은 바로 그러한 맹목으로 이 세계를 바라본 후의 기록물로 등단하였다. 본디 희미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시인이다. 「맹목」(2016년 《영주일보》)에서 “날짜 변경선”이라고 지명한 선이 보이는가? 하루가 교차하는 특정 지점을 지목하고 있으나 정작 그곳은 없다. 보았으나 보이지 않는 현상이 맹목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력 문제가 아니며 감각의 착란이 유발한다. 그간 익숙해진 것을 ‘너’가 박차고 나갈 때는 비동일화를 꾀하겠지만, ‘너’가 ‘이방(異邦)’이 아닌 ‘회귀점’이라면 ‘너’는 ‘나’의 타자이기보다 동일성을 꾀하는 자, 즉 맹목을 자기화한 자다. 그런 까닭에 화자는 장소의 고정성, 타자에 대한 맹목을 벗어나면서 언어 창신(創新)의 세계로 비상한다. 그것이 설령 비행(非行)일지라도 말이다.
수록 시 「착란」은, 어떤 혼란·교착·어지럼증들이 지속하는 매우 불가지한 상태다. 착란은 이 세계의 안정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다. 이러한 증상이 악몽처럼 현실화한다는 것이 시인이 생각하는 인간 관계론이다. 시를 보면, 당신은 본래 자신과 “다른 주파수를” 가졌고, 두 사람이 “달팽이관 앞에서” 포옹을, 그것도 “남남이 되자고” 하는 행위라는 데서 착란이 유발하는 효과가 정점을 찍는다. 이것은 달팽이관의 기능을 균형/불균형 사이의 착란으로 직관하는 자라면 능히 알 만한 별리의 장면이다. 이명 현상처럼 조화가 깨진 둘의 관계가 그것이며, 내면화한 이별 감정과 다르게 포옹으로 나타나는 행위를 두고 균형 감각을 잃은 착란으로 표명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특별하다.
음계를 벗어난 음정과 엇갈린 박자들이 쓸려와 앓는 곳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귓속에 쌓이는 소리의 무덤을 당신은 알까
달팽이관 앞에서 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
―「착란」 부분
시인은 이렇게 소리의 잔향으로도 당신과의 관계성을 사유한다. ‘귀’의 역능으로 서로를 감각하려 하지만, 정작 듣지 못하는 청각기관의 부정성을 시화하고 있다. 정원을 건너가는 나의 발소리에 무감각한 당신이 나의 심장 박동을 들을 리 없고, 당신의 집 앞에서 울었던 내가 당신의 귀에는 무심하게도 빗소리처럼 원격화한다. 소리를 죽여 가만히 동일화를 꾀하는 화자의 소리를 끝내 듣지 못하는 당신과의 비동일화 감정이 선연하다. 애써 주파수를 맞춰 보았으나 “지지직”거리는 악몽만 살아나는 화자에게 당신과의 소통은 불가능한 일이다. 죽은 자도 타자의 소리를 들을진대, 살아 있는 당신의 귀가 둔감해진 시적 현실은 마땅히 무덤 속보다 캄캄하다. 그렇다면 온전한 타자되기로만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들을 귀가 없는 주체는 사랑의 대열에서도 잠적해야 맞지 않겠는가.
온몸으로 타자 앞에 서 있는 인물이 김네잎 시에 없지는 않다. 완결체로서 몸은 틈·간극·거리를 두고 서로 치고 빠지면서 쟁투하는 관계다(「복서」). 그럴 때 그 몸은 근대적 인간의 표상인 통일체이고, 그들의 고투는 땀내 나고 굳은살이 박인 몸으로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그 외 대부분의 시에서는 몸 중심의 감각이 아닌 제각기 별다른 역능을 수행하는 감각기관이 분발한다. 그 기관들 중 소리의 주관처는 이 시인에게 소중한 상상의 발생지다. 시인의 별다른 상상력이란 것이 은폐된 세계를 새로운 감각으로 갱신하는 것이라 할 때 「착란」은 그만큼의 성취에 도달해 있다. 남남과 포옹할 때의 착란만큼 지대한 모순이 달리 있을까. 저러한 역설과 두 사람의 비동일화 감정이 그대로 시 한 편이 된다.
이런 점은, 또 다른 시에서 시인이 쓴 도시 사무직 근로자의 얼굴에 가둬진 “하나뿐인 표정”에서 생각 없는 인간을 읽는 것으로도 변주된다(「마리오네트」). “모든 감정이 와해”되어 “불가피하게 남은 무표정”, 단일 표층일 뿐인 얄팍한 얼굴들이 “묵묵한 외연”(「뫼비우스 증후군」)을 견지한다. 시인은 이토록 무감각한 이들이 사는 세상을 깨고 나가면서 그들의 표정을 복기한다. 감각의 표상인 얼굴에 떠 있는 무표정을 읽어내고, 감각기관을 쪼개어 표정을 현출시키면서 현대인이 잃어버린 감정을 들춰낸다. 얼굴은 몸 중심으로 보면 국소 부위이지만, 감각기관 중심으로 보면 감각의 통합체다. 하여 김네잎 시에서 얼굴이 잠적하는 일이나 감각기관의 비동일화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다. 부분 감각으로나마 읽어야 할 현대인의 마음을 찾아 나가면서 개별 감각들이 분발토록 한다.
김네잎은 ‘당신’을 분열적으로 생산한다. 일부는 대상 a로, 또 다른 일부는 대상 A로 분화한다. 소타자의 계열에는 사랑의 감정이나 애착도 없이 건조한 자들이 있다. 대타자의 계열에는 언령(言靈) 또는 정신적 교감의 대상으로 볼 만한 이들이 있다. 작은 타자는 일상의 지형을 공유하지만, 큰 타자는 기다림의 형태로 화자를 깨어 있게 하거나, 졸면서도 기다림을 멈출 수 없게 한다. 그런데 문제적인 것은 당신이 늘 떠나기만 하는 타자라는 점이다. 더 이상한 것은 미궁 같은 당신과의 연관 속에서만 말들이 태어난다는 것. 시인을 말하게 하는 자가 ‘당신’이다.
당신 중에는 말없이 분위기로만 교감하는 자도 있다. 「와류의 방식」에서 보듯이 욕조의 구멍 쪽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처럼 어지러운 에너지로 당신과 나는 만난다. 기압이 팽창하는 ‘적도’를 공유하고서 시계 방향과 그 반대 방향으로 와류하는 듯한 관계다. 의도성이 없는 휘말림, 퉁퉁 불어나기만 하는 생각을 안고 돌다가 당신이 그대로 사라지거나 모르는 사람이 될까 봐 염려가 된다. 몸 없이 와서 나의 생각을 부풀리면서 짧은 시간 현몽했던 당신은 정녕 교감의 대상이지만, 명징하지 않은 혼란으로, 서로를 끼고돌기 직전에 가졌던 기대감만으로 다녀간다. 당신은 몸 부재의 타자, 무의식 중 말없이 현몽하는 어떤 모델이다. 김네잎 시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꿈 작용들은 이와 같은 연상들로 이뤄져 있다.
김네잎은 자화상 그리기에 빠진 나르시스트가 아니다. 시작(詩作)을 기억에 걸어놓고 퇴행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자아에 몰입하는 초기 시의 유아적 나르시시즘을 경쾌하게 벗어난다. 냇물에 투영된 화자의 얼굴이 “무늬 없는 여자”(「천변의 잠」)라는 발견은, 자기동일성을 거부함으로써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겠다는 표명이다. 화자는 산책자들이 “손을 잡는 방법”을 졸음에 겨운 채 바라보면서 ‘같이’의 가치에서 동떨어져 앉아 당신을 기다린다. 도래하지 않는 타자를 기다리면서 졸고 앉아 있는 그의 자세에는 기약 없는 기다림, 당신이 끝내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허방치기의 감정도 엿보인다. 그는 주변을 “구성”하는 세계를 감각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그 세계로부터 격리한다. 모든 당신은 언제나 당신 그 자체이고, ‘나’가 부를 때에만 존재한다. 본래 타자인 자를 다정하게 부르며 기다리는 일 속에서만 있는, 본래 없는 자다.
2. ‘홀로’의 타자성을 넘어
서로 타자인 사람들 사이에 상호성은 없다. 타자들 간 비대칭적 관계에 대해서는 레비나스도 일찍이 표명한 바 있다. 모든 타자들이 신비한 경우라면 누구든 예외 없이 홀로서기의 윤리가 가동하는 때다. 상대방에게 갖추는 예의도 신비감이 유발하는 장식적 자세일 수가 있다. 상대방을 모를 때에만 신비감을 품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관계를 소격하는 요인이다. 신비감을 잃은 타자에게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은 ‘나’가 그를 익히 잘 알아서다. 때문에 신비감은 비동일성을 감각하는 자의 것이며, 그런 이유로 모든 ‘홀로’의 주체들은 신비하다.
김네잎은 작고 사소한 기호로 전체를 제유하는 기법 구사에 능숙하다. ‘괄호’ 부호를 “오래된 직립”(「괄호」)으로 직관하는 시만 봐도 이 시인의 감각에서는 첨예하고 특수한 이미지의 돌기들이 돋아나는 듯하다. 간접 언술의 미학과 구체성을 배합한 시인의 상상력은 스무 살 소녀의 실존에 맞춰져 있다. “득실거리는 눈, 눈, 눈, ……, ……)”이 보이는가? 직립해 온 인간의 자질과, 지금은 걸어가고 있으나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정황을 이미지로 내건 시 구절이다. 뒤통수에 꽂히는 수많은 타자들의 시선을 느끼며 소녀가 걸어간다. 이후 만나야 할 타자가 자신을 쓰러뜨리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하는 괄호-인간의 이미지가 놀라우리만치 돌올하다. 화자의 “뒤쪽엔 기분이 너무나 많”고, “원조와 원조 사이”에서 자본 협상을 거친 후에는 쓰러져줘야 하는 자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자에게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일이므로 난감하기만 하다. 이렇게 김네잎은, 직립 괄호의 쓰러짐과 부끄러운 ‘발’이라는 표상으로 스무 살 화자의 현실을 제유한다. 타자에게 관심을 두고, 자아 탐닉을 넘어 사회로 확장하는 글쓰기는 이 시인이 지닌 미덕이다.
그밖에도, 고층 빌딩에서 일상적으로 야근하는 사무직 근로자(「마리오네트」), 그 외벽에 매달려 그림자도 없는 유령처럼 유리를 닦다가 추락하는 위험직군(「공중에서의 잠」), 역 대합실에 버려진 아이와 따뜻한 후원자들(「이소」), 가족은 해체되었으나 같은 아픔을 가진 이를 만나면서 한 뼘의 희망을 갖게 된 소녀(「오토바이가 지나가면 바람은 맛이 달라진다」), 수용시설에서 제빵 기술을 재능 기부하는 강사(「재능기부」), 보살핌의 윤리가 가동하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타자화된 노년층(「차골」)들이 있다. 동일화할 수 없는 ‘당신’들의 욕망 속에서 자기를 차별화해야만 굳건히 살아낼 수 있는 시대이지만, 위와 같은 인간 군상은 결코 비동일화 감정으로만 만나야 할 타자들이 아니라는 데에 시인의 인식이 자리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타자되기의 과정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은 시인이 아름답다 여기는 이 시대의 표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되기는 지독하게 어렵기만 하다. 반면에 되기의 과정에서 번번이 상대적 타자로 남는 경험은 가깝다. 달의 앞면만을 보면서 납작하고 둥그런 달의 형상을 완벽하다고 여기는 자처럼, 어떤 이는 타자의 앞면만 보고도 그에게 몰입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관계를 “어두워질수록 가까워지고, 가까워질수록 절망이 되는 종족”(「오버랩」)이라고 부른다. 상대방의 일부가 되지 못한 여분만이 오롯이 자기다움을 확증하는 것이라면, 타자되기란 것이 자신의 정열을 투입하여 “타인을 연기”하는 일은 아닌지를 묻는다. 되기와 연기 사이의 간극은 동일화의 노력으로만 오버랩된다. 이때는 오직 사랑함으로써만 가능한 되기의 과정이 지속적으로 타자를 향해 열려야 한다. 오버랩 부분처럼 차라리 캄캄해져서 서로에게 맹목인 자들만이 상호 교감을 말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정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나의 암흑”과 “너의 밝음”으로 분리된 채로 서로의 맹목을 결코 조성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있다. 마주 앉았으나 암흑 덩어리 같은 ‘나’만 일방향의 바라보기를 한다. 이렇게 일방의 관심과 바라보기는 어둠이 아니면 빛이라는 배경을 만든다. 화자는 암흑 속에서 너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눈을 감지 않았다고 말한다. 눈을 뜨고도 네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간절해 보인다. 함께 더불어 캄캄해질 수 없는 너와의 비동일성을 안타까이 감내하는 이들에게 이 세계는 타자되기가 아니면 타자로 남는 곳이다. 암흑과 밝음이 만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다음 시에서처럼 메타세쿼이어의 우듬지쯤 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몸이 지금 거꾸로 곧추선 자세로 허공에 뜬 채 바닥을 향한다.
바람과 시야, 그리고 각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11
메타세쿼이어는 아직도 키가 자라고 있다
우듬지에서 까치발로 놀아 볼까
내가 숲을 연기할까
(중략)
1
나의 처음은 이 정도 높이였을 거다
보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이 더 많던
0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젠 귀찮은 생각 따윈 지우고 말끔하게
―「떨어지는 자세」 부분
이 시의 의외성은, 완벽한 성공을 향한 기대가 삶이 아닌 죽음 쪽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11에서부터 0까지 역순으로 번호를 붙여 연을 구분한 여기서 숫자 기호는 추락하는 자의 몸이 거꾸로 직립한 자세, 그 몸이 거쳐 간 층 또는 무섭게 흘러가는 ‘초’의 기표다. 최종지점인 0에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러한 자기 살해의 자세는 결코 뒤집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삶에 대한 저항의 표지다. 자기 살해의 기획이 화자가 그간에 겪은 상처와 아픔들을 더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면 이것은 기억 속으로의 퇴행에 머물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서사를 지닌 이 시는 그러한 자기 치유로 끝날 사건이 아님을 추락하는 인물의 역자세로 보여준다. 어쩌면 화자는 창유리 너머로 자신을 노출하는 삶을 초인처럼 감당했을 것이며, 같은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려한 “레이스를 가져본 적”이 없는 자본 열외자다. “허공을 사랑한 적 없”는 자가 그 허공을 거쳐야만 하는 필연을 “진행 중인 추락”으로 보여주면서 이 인물은 허공 같은 삶의 조건을 감당하기를 그만두고 자발적인 탈락을 자처한다. 수퍼우먼이 되어야만 허공 같은 실존을 지탱할 수 있었던, ‘홀로’인 저 여자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선택이다. 다음 시는 세대 간 상호 존중과 관용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돌아본다. 현장성을 살리면서 노년의 안타까운 실존을 시화한다.
누워 있을 때 천장이 자꾸 너머를 부추겼을 거다
바닥은 많아도 옥상은 없는 가난한 십정동
생각이란 쓸모가 없고 과거는 빠듯하니
미래가 망상으로 치닫는 걸 냉골이 방해한다
산 10번지 전체가 정원이라고 말하던
이웃집 여자노인의 엷은 미소는 작년 겨울에 떠나고 말았다
가까운 곳과 먼 곳에 전부 계획이란 걸 심어놓더니
차골의 사용법을 알면서 펼치지 못했다
―「차골(叉骨)」 부분
나이듦에 대한 자각은 몇 줄의 시 구절로도 충분하다. 노년의 의미가 질병을 끌어안고 연명하는 것이거나, 자녀에게 일찍이 심정적으로 버려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마저 방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면화한 채 살아가는 노년 세대가 이 시에 등장한다. 신체 기능의 쇠퇴가 생명성을 평가 절하하는 사태로 이어지는 일은 2010년대 중반부터 우리 사회에 노골화한 현상이다. 노년 세대를 향한 혐오감이 공공의 영역에서 이뤄진다고 할 만큼 ‘틀딱’이니 ‘꼰대’니 하는 비하 발언이 유통되었다. 동시대인이 공유하는 당대 삶의 영역에서 노년 세대를 배제하면서 그들의 시간을 물질처럼 수량화한 것이다. 사후에나 간신히 생전의 시간을 되살려 추억하는 자세를 젊은 세대가 취하겠지만, 이것은 노년 세대와 공유한 기쁨·기대·정서·행복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노년이 감내하는 고독감은, 젊은 세대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흐른다. 현대는 젊음의 가치와 열정을 중시했던 근대와 다른 가치관을 요구한다. 수명이 길어진 노년 세대가 겪는 고독을 제도로 보완하고, 담론을 구체화해야 하는 시대다. 세대 문제는 한 세대의 고민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시인은 이 시대 문제의 해법과 연결 계기가 당대인에게 있으나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는 점을 ‘차골’ 비유로 일깨운다. 시인이 일러주는 대로라면 ‘차골’은 새의 날개와 가슴을 이어주는 뼈, 즉 노인 세대의 비유다. 양손을 깍지 낀 형상, 즉 어떤 이음매의 기능을 상상하면 될 듯하다. 지금 생존 중인 노인 세대는 외부에 현존하는 동시대인과의 연결로만 가능하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김네잎에게는 시민으로서 사회화를 꾀하는 시적인 고안도 중요하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화자는 “시민으로 분류되지 않은 노인 몇”이 독거·독신으로 연명하는 “십정동”에 동시대인으로서 참여한다. “관청이 멀다”는 것으로 보아 관청의 보살핌으로부터는 소외되어 있다. 부랑하거나 임시 거처에 머물고 있는 비시민-노인에게 “안녕은 개뿔!”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을 증명할 방도가 없어서다. 한 틈의 망상조차 허락지 않는 냉골의 현실, 그런데도 누운 자세의 편안함 속에서 느끼는 죽음의 유혹. 이것이 독거·독신 노인에게 닥치는 일상 자체의 무거움이자 냉찬 실존이다. 가파르고 추운 현실을 상상적으로 미화하여 자신이 사는 산동네를 “전체가 정원”이라며 좋아했던 여자노인은 지난해에 세상을 떴다. “차골의 사용법을 알면서”도 펼쳐보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목숨은 늘 경각에 달린 것이었다. 화자도 그들과 다름없는 목숨값을 사는 주체여서 “가슴 안쪽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 중이다.
3. 말문을 열고 ‘우리’ 되기
김네잎 시는 어디서부터 읽더라도 ‘당신’을 피해 갈 수 없다. 시 쓰기의 고민을 ‘당신’의 도래와 떠남으로 이미지화한 시편들이 이 시집에는 상당수 있다. 당신과의 파탄으로만 당신을 다시 보는 일이 가능한 이 세계의 어디서나 당신은 서성거린다. 당신과의 연관 속에서 언어를 정립하려는 욕망은 파탄 이전부터 꿈틀거린다. 더 위험한 표현을 하자면 당신과 만나는 일이 이미 파탄을 내포한다. 파탄 후에 다시금 당신을 욕망하는 사이클 안에서 기대감이 와류하고, 분위기로만 맴도는 관계에서는 언어 소통의 통로가 열리지 않는다.
감각기관을 분리하여 낯선 세계를 보려는 시인에게 ‘소리’는 시선의 압제를 벗어나려는 은밀한 파동이다. 들을 수 있는 귀만 그것을 듣는다는 점에서는 눈으로 보기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보고 들으려는 의지만이 이 세계를 의미화할 수 있다. 이 시에서 “0.5초의 못갖춘마디를 실감하는 자리”(「심벌즈」)라는 것이 엇박자를 놓아 정형을 깨는 운율을 뜻한다면, 이 시에서 그린 심벌즈는 못갖춘마디에서 잡아채야 할 타이밍을 번번이 놓치기만 하는, 영혼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한 마디 안에서 처음과 끝의 절대적 길이는 유지하면서 순간적으로 짧게 긴장감을 당겨 넣어 곡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못갖춘마디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못갖춘마디가 암묵적으로 갖춘 것이 있으니 의외성·돌발성·긴장감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표현하려고 투입되었던 인물이 남겨놓고 간 손바닥을 심벌즈로 가정하면 이 연주자는 영혼 없이 박자만 타는 자에 그친다. 정형을 배반하지 못했으므로 절정을 만드는 데도 서투른 연주자다. 완벽한 것, 고정된 것은 예술작품의 비동일화에 기여하지 못한다. 예술도 ‘당신’처럼 예측 불가능한 타자성으로 신비감을 조성하는 형식이다.
시 생산자의 고민이 작법에 그치지 않는 것은 사회로 확장하는 자아가 있어서다. 김네잎 시에서처럼 화자가 비교적 뚜렷한 경우에는 서정적 주체를 질문하기보다 타자성을 바탕으로 화자의 지향을 읽어낼 수 있다. 그의 시는 ‘당신’을 비호혜적 관계로 그릴 때 자아의 지향이 한층 분명해진다. 당신의 도래를 명징한 정신으로 기다리는 화자도, 열정에 겨워 기다리는 화자도 그의 시에는 없다고 보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 결국 떠나기만 하고, 늘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진정 영원한, 신비로운 타자다.
당신은 당신을 내 호흡 속에 숨겨두고
방치한다
분위기를 갈아줄 태도가 없는 날들
바닥에 들러붙은 몽상들이
검게 번져나오고
이미지들이 물풀처럼 흔들린다
이 구성엔 에피소드가 충분하지 않다
던져주는 어분처럼 흩어지는 캐릭터
불면처럼 쏟아지기를 거부하는 알약
―「물고기의 시간」 부분
시적 수행을 언표한 작품으로 보아도 좋을 시편이다. 시인이 쓴 대로 옮겨보면 ‘생각·이야기·몽상·이미지·에피소드·캐릭터·배경’들이 물고기가 유영하는 이미지와 함께 어항으로 추정되는 구조물의 구성체로 배치되어 있다. 시 생산자의 생각이 잠길 만한 바탕(=물)을 위시하여 ‘없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투성이인 구조물에 갇힌 자의 감각으로 화자는 저러한 구성체들 속에서 생각과 몽상에 잠겨 있다. 시 한 편에 내재화할 만한 구조물을 고민하는 이 시는, 그 모든 질료들을 문자 기호로 바꾸지 않는 한 몽상에 그친다는 점에서 언령의 도래를 생각게 한다. 당신은 숨결처럼 오지만 화자에게 절대적 생명성으로 머무르지는 않음으로써 곧장 소격된다. 당신은 끝내 낯선 자여야만 하고, 그가 떠남으로써만 그것이 가능해진다. 언제나 수상한 ‘당신’은 무한수의 타자로 왔다가 떠나고,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과의 비동일성을 절감할 때 터져 나오는 말문이 화자에게는 한 편의 시다.
이제 작법의 고민에서 도약하여 언어의 작용을 기호화한 시를 보자. 「흑단」에서 당신은 침묵으로 모든 말을 하고, 화자는 많은 말을 해놓고도 허기증을 느낀다. 「거짓말, 혹은」에서는 각자 다른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그것을 탕진하기까지 하는 ‘우리’가 있다. 의미를 거세한 채 뜻 없는 소리만 접수하는 것이 청각 작용이 아닌 마음의 문제일 때 “우리들”은 증발하고 만다. 이름 없는 익명의 작가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인터넷 공간을 그린 듯한 「고스트 라이터」는 자신이 쓰는 글에서 자신을 원격화하는 허구성, 세상의 모든 글이 어느 때인가는 유령처럼 인터넷 공간을 점령할 거라는 예견을 조금은 섬뜩하게 안긴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서는 “소리들이 소리가 없는 꽃으로 피어나”(「Beethoven No.60」)는 공감각 효과를 “색청(色聽)”, 즉 청각을 시각으로 바꿔 이미지로 내거는 시작법에 대한 고민으로 담아낸다.
이렇게 시인은 ‘당신’과 ‘우리’에 들씌워진 고정 의미들을 내파하면서 그 타자적 특성을 탐구한다. 당신(當身)은 상황의 변수를 그대로 반영하는 매우 개별적인 주체다. ‘바로 그 해당자’라는 타자성으로 이해하면 당신은 변하는 상황에 따라 마땅히 달리 해석해야 맞다. 이렇듯 개별적인 당사자들이 시인에게는 무수한 ‘당신’들이다. 그들 중 일부가 언어(말/글)로 온다는 관념 안에서 시인은 시적 수행을 한다. 「흑단」에서 보듯이, 말을 해야만 말이 아니고,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된다는 당신의 관념이 나와의 싸움으로 비화하는 정황은 어떠한가. 언어로 소통하지 않는 당신은 “모르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일 뿐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가공의 드라마 같은 정황이 나와 당신 사이에 펼쳐지는 건 당신이 “무언극”에서처럼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 수행에 대한 김네잎의 고민은 이렇게 전방위적이며 끝도 없다. 그렇다면 언어의 문이 닫힌 당신과 나는 언제 ‘우리’가 될 것인가.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우산을 같이 쓴 채 우중의 광장을 말없이 걸어가지만 이들은 각자 비밀과 암호를 숨긴 개체다. ‘우리’를 한 몸으로 보는 관념을 타자성이라는 침봉으로 찌르는 듯한 감각이 이 시집의 도처에 포진해 있다. 이렇게 생동하는 예민함으로 시인은 서로를 껍질로 만드는 “비언어적인 기호”(「우중의 광장」)들을 벗겨낸다. 오직 언어만이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는 진리 내용은 김네잎에 이르러 다시금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범상하지만 부단하게 환기되는 이 주제는 어느 시대인이든 환영할 만하다. 아무리 시간을 격한다 해도 변함없는 진리 내용인 언어가 사람의 말이라는 점과, 사람의 말을 시어로 가공하거나 변주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이 시집에 담겨 있다. 제각기 파편인 사람들의 입에서 깨진 기호처럼 발화되어 의미 없이 떠도는 언어의 유령을 다독여 그것을 문자로 옮기는 열정. 김네잎은 그렇게 한 편 한 편 시를 썼을 것이다.
김효숙 | 2017년 『서울신문』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