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680 알코브가 있는 방 알코브가 있는 방 물방울 속으로 스며든다 무릎을 모아 안는다골똘하게복기하기 좋은 자세 동그랗게너무 익숙한 1인칭 감옥지속될 것 같아 잠든다깊게 방 속의 방어둠이 새롭게 부화한다 * 여기는 까마득하고 눈물의 언어로 채워진 방 방향이 없어서무수하게 집요하게구심력을 갖는다 * 무색무미무취인 내가빈난한 내가 빛을 들이면 경이로운 무지개를 빚을 수 있을까 * 봄의 부빙처럼 착상된 어둠이 따듯한 쪽을 향해 움직인다 마침내, 빛이 고로 나는 증발한다 - 문학저널 2026 여름호 2026. 8. 18. 데페이즈망 데페이즈망* 은하와 은하 사이엔 뭐가 있나요? 내 물음에 다정한 늙은 이웃은 거긴 온통 공허뿐, 그날 나는 억겁을 떠올리며 단애에 앉아 긴 꼬리를 가진 혜성을 배웅했지 이 은하에서 나는 뭉개지거나 쪼개져야 온전할 수 있는 유기체란 생각뿐이라서 기도는 하지 않았지 그저 동남쪽 밤하늘에 뜨는 별자리로 일과를 점쳐보는 건 버릇일 뿐이지 이윽고 유성우가 범람하는 밤은 꼭 올 거야 적어도 그중 하나는 내 심장 속을 관통하겠지 거기 새겨진 문장들이 죄다 불타 없어지면 난 비로소 무기체가 될 수 있을까 꿈이란 근사한 말이 돌아다니는 지구는 내게 어울리지 않아 난 어제나 내일보다 오늘을 더 신뢰하니까 늙은 이웃은 가끔 내게 묻곤 하지자네는 어느 별에서 왔나? * 데페이즈망(dépaysement): 본래는 ‘나.. 2026. 5. 8. 원데이 클래스 원데이 클래스 무엇이든 먹자고, 걷는다매번 구체적이다배고픔은 국숫집은 아무래도 찾을 수 없다 너와 함께 국수를 먹고 골목 안쪽 목공방에 들러 원데이 클래스를 들었던 그곳을 도안에 맞춰나무 자르는 법을 익히고 목재를 재단하고사포질은 하면 할수록 도마다워지던 죽은 나무자꾸 쓰다듬게 된다표면에 바른 오일이 마르는 동안, 너는 햇살에 부유하는 톱밥 먼지처럼 들떠있다 캄포나무는 플레이팅 보드로 제격이죠공방 주인의 말대로 너는도마 위에카나페를훈제 연어를김밥을 나중에는 아무거나 올려 먹을 거면서정말 아무거나아무 감정이나그것을 대체로 너 혼자서 어디에도 그 국숫집도 그 목공방도너도없다 카나페는 크래커에 치즈를 얹고 야채 박스에서 굴러다니는 토마토나 사과 같은 걸 올리면 돼, 아주 간단하지?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 2026. 5. 8. 수요 모임 -북클럽 수요 모임―북클럽 첫눈이야, 달뜬 당신 목소리가나를 깨웠다사실 올해의 첫눈은 1월 언제쯤 내렸을 텐데지금은 11월인데 왜 첫눈이라고 해? 물으려다 말았다 * 오늘의 필독서는 고골의 『죽은 혼』이다이 소설엔 파벨 이바노비치 치치코프가 등장한다 러시아 지방 N시가 배경인데 작가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두 나라의 겨울은 몹시도 춥고 그 사람은 죽은 농노의 이름을 사러 다닌다 두 나라엔 농노가 많다 난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늘 누군가는 늦고내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을 읽는다옆 사람이 필사한 글씨체는 단정하다시계방향으로 돌아 곧 내 차례인데감상은 발표를 싫어한다 책갈피에 붙인 포스트잇을 떨어뜨렸다 포스트잇이 실수로 탄생한 것처럼 당신은 실수로 태어났다는 말을 들으며 컸다.. 2025. 6. 27. 측량 측량 측량사가 의뢰서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죽기 전 습관을 잊지 못한 것 같다 연신 땀을 닦는다 여기는 날씨가 구현되지 않는 꿈속인데, 그는 이곳과 저곳의 사이가 너무 멀리 있어서 감정의 곡률 보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매우 정확해야 하니까 정밀한 측지기구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며 돌아서는데 나는 오래 죽어 있어서 입이 없다 차안과 피안은 서로의 범위 바깥에 있다이미 없는 난데 좌표에 표시되지 않는 두 지점나는 과거였고, 내 기억은 먼 훗날에 태어날 미래였다 내내 기다리는 자세로 측량사가 작성한 도면을 보고 있다 그는 이제 땀을 닦지 않고 여기에 적당히 적응한 것 같다 그는 나의 요청대로 북극성 옆을 지표로 삼았다며 재차 이곳과 저곳의 차이를 확인시켜줬다 나는 끝까지 죽은 사람이구나한 채의 집.. 2025. 6. 27. 표준인간 표준인간 1abc÷abc=1abc가 a와 b와 c로 나뉘어도서로는 동일시한다 하지만 뭐든 깃들어 함께 살면 개연성이 생긴다 2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 a는 실외에 있었다 잠깐 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는 젖어 있다 3편의점에는 b말고도 우산을 사려고 우산을 펴보는 사람이 있다어떤 사람은 비를 맞으며 달린다 b가 산 우산은 함께 쓰기엔 작다 4우산은 공통분모도 괄호도 아니라서 하나로 묶는 습관을 거부한다 abc와 acb, bac와 bca, cab와 cba는 완벽하게 비를 피할 수 없다 a자리에 나를 b자리에 당신을 c자리에 우리를 넣어도 마찬가지 5어둔 방ⓐ ⓑ ⓒ는꿈을 꾼다 그러나 자신이 꿈을 가졌다고 자신을 확신할 수 없다 - 웹진 님Nim 4월호 2025. 4. 1. 이전 1 2 3 4 ··· 1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