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序(서)
- 오규원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3
바람이 분다, 살아보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고
길을 구부리고 지우고
그리고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오늘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뒷굽 - 허형만 시인님 (0) | 2013.11.01 |
---|---|
혼자 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 이은봉 시인님 (0) | 2013.09.20 |
바람의 분침 - 황학주 시인님 (0) | 2013.09.02 |
구르는 오디오 1 - 손택수 시인님 (0) | 2013.08.25 |
가을 저녁의 말 - 장석남 시인님 (0) | 2013.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