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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

순례 序(서) - 오규원 시인님

by 즐팅이 2013. 9. 15.

 

 

순례 序(서)

            -  오규원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3

바람이 분다, 살아보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고

길을 구부리고 지우고

그리고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