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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쩌다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굴을 내민 시[발표작]142

수요 모임 -북클럽 수요 모임―북클럽 첫눈이야, 달뜬 당신 목소리가나를 깨웠다사실 올해의 첫눈은 1월 언제쯤 내렸을 텐데지금은 11월인데 왜 첫눈이라고 해? 물으려다 말았다 * 오늘의 필독서는 고골의 『죽은 혼』이다이 소설엔 파벨 이바노비치 치치코프가 등장한다 러시아 지방 N시가 배경인데 작가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두 나라의 겨울은 몹시도 춥고 그 사람은 죽은 농노의 이름을 사러 다닌다 두 나라엔 농노가 많다 난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늘 누군가는 늦고내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을 읽는다옆 사람이 필사한 글씨체는 단정하다시계방향으로 돌아 곧 내 차례인데감상은 발표를 싫어한다 책갈피에 붙인 포스트잇을 떨어뜨렸다 포스트잇이 실수로 탄생한 것처럼 당신은 실수로 태어났다는 말을 들으며 컸다.. 2025. 6. 27.
측량 측량 측량사가 의뢰서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죽기 전 습관을 잊지 못한 것 같다 연신 땀을 닦는다 여기는 날씨가 구현되지 않는 꿈속인데, 그는 이곳과 저곳의 사이가 너무 멀리 있어서 감정의 곡률 보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매우 정확해야 하니까 정밀한 측지기구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며 돌아서는데 나는 오래 죽어 있어서 입이 없다 차안과 피안은 서로의 범위 바깥에 있다이미 없는 난데 좌표에 표시되지 않는 두 지점나는 과거였고, 내 기억은 먼 훗날에 태어날 미래였다 내내 기다리는 자세로 측량사가 작성한 도면을 보고 있다 그는 이제 땀을 닦지 않고 여기에 적당히 적응한 것 같다 그는 나의 요청대로 북극성 옆을 지표로 삼았다며 재차 이곳과 저곳의 차이를 확인시켜줬다 나는 끝까지 죽은 사람이구나한 채의 집.. 2025. 6. 27.
표준인간 표준인간 1abc÷abc=1abc가 a와 b와 c로 나뉘어도서로는 동일시한다 하지만 뭐든 깃들어 함께 살면 개연성이 생긴다 2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 a는 실외에 있었다 잠깐 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는 젖어 있다 3편의점에는 b말고도 우산을 사려고 우산을 펴보는 사람이 있다어떤 사람은 비를 맞으며 달린다 b가 산 우산은 함께 쓰기엔 작다 4우산은 공통분모도 괄호도 아니라서 하나로 묶는 습관을 거부한다 abc와 acb, bac와 bca, cab와 cba는 완벽하게 비를 피할 수 없다 a자리에 나를 b자리에 당신을 c자리에 우리를 넣어도 마찬가지 5어둔 방ⓐ ⓑ ⓒ는꿈을 꾼다 그러나 자신이 꿈을 가졌다고 자신을 확신할 수 없다 - 웹진 님Nim 4월호 2025. 4. 1.
로그아웃 로그아웃    걷는다우리를 따라 둘레가 휘어진다 저기, 문장이 적힌 종이가 유리병에 갇힌 채둥둥 떠다닌다 가라앉지도흘러가지도흐느끼지도 못하는 편지 모든 호수는 전생이 바다였대누가 먼저 돌을 던질래? 굴러다니는 것들은 많은데손안엔 클릭과 터치만 있다 관리인이 탐조등을 비춘다아래로 위로 흔들리는 밝고 작은 세계 우리의 어색함이 쏟아진다 골풀과 갈대와 부들이 자라도록 재구성된가장자리를 따라 노곤한 감몽에 든 연인들을 지나혼곤한 악몽에 쫓기는 노인들을 지나 우리가 만료되어가는 너와 나 자연호수는 없고 인공호수만 있는 도시에서우리가 만든 최초의 떨림은어디를 헤엄쳐 다니고 있을까 내일부터 우리는 무엇으로 재부팅될까 - 2024 《아토포스》 여름호 2024. 7. 8.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   모체에서 동시에 두 개의 심장이 발생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너는 스스로 박동의 스위치를 꺼버렸다내가 가담자였는지이내 잊었지만 나는 네가 남긴 슬픔의 입자를 움켜쥐고 점점 더 선명해진다 웃지만울지 않아 그래서 아픈 거야 매일 밤 천사가 찾아와 속삭였다 내 몸이 자라는 속도보다 슬픔이 먼저 차올라서 자꾸 넘치는 우리우리의 시우리의 어둠꿈속까지 잠기는 연(緣) 누구의 잠인지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 불안과 이질감 여긴 낯설어지는 방이구나무결한 눈물로 소실(小失)을 애도하는 곳내 꿈속을 벗어난 꿈을 돌보는 곳 나는 자꾸 두 개의 심장을 두 개의 마음을 상상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별을 습득한 것 같아아무래도 네가 너를 슬쩍 남겨 놓은 것 같아 .. 2024. 7. 8.
홈&쿠킹 홈&쿠킹    두부는 늘 반모가 남는다 금세 부서질 미래기후 우울증 치료엔 하루 한 끼 채식이 권장되었다 브로콜리의 녹색 꽃눈을 데치고, 양파를 깐다 중세 서양에서는 양파를 결혼 선물로 주었다는데 그 결혼, 양파보다 덜 매웠을까 열을 가하면 설탕 50배의 단맛 성분이 형성되는 것처럼 열렬한 그 사랑, 끝까지 달았을까  찜기에서 꺼낸 가지가 식기를 기다리며 병아리콩 브라우니와 커피를 들고 창가에 앉는다건물 위는 비행기가 다니는 길이다  캐리어처럼 질질 끌려 다니던 당신의 그녀는 괜찮을까 가지가 너무 물렁해졌다물을 적당히 맞추고 적당히 가열했는데 적당히는 스스로 체득한 기억이라서 매번 실패한다그래서 적당히 좀 해, 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두부와 시금치, 오이와 당근처럼 함께 있으면 독이 되는 사람도 있다2인.. 2024. 6. 6.